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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藝術의 뜰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유퀴즈 온더 블럭'에 아버지와 나온 박준 시인의 세계관이 맘에 들어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과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세트를 구입했다. 시집을 먼저 읽을까 산문집을 먼저 읽을까 고민했는데, 시를 보기 전에 박준 시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어 보았다.

 

작가의 감수성을 느낄 수 있게 몇 편을 여기에 옮겨 보려 한다.

 

 정확히 10년 전 겨울,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나는 그때 넓은 평야를 가진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걸어다니던 시간이 길어졌다. 패스트푸드점과 병원이 있는 터미널 근처 8층짜리 건물이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리고 내가 묵고 있던 작은 여관이 바로 옆에 있었다.

 도시 어디에서든 그 8층짜리 건물은 훤히 올려다보였다. 발길 닿는 대로 낯선 걸음을 옮겨도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것이 좋았다. 문제는 그 사실을 믿고 너무 멀리까지 걸어가는 탓에 매번 지칠 대로 지쳐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는 것이다. 걷는 일에 무슨 특별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야를 걷는 일은 그렇게 조금 다른 질감으로 다가왔다.

 내가 머물고 있던 여관의 입구에는 '달방'이라는 팻말이 크게 적혀 있었다. 한 달치 방값을 선불로 내면 원래 금액의 절반도 안되는 값으로 숙박비를 깎아주는 모양이었다. 나는 알고 있으면서도 '달방'이라는 마음에 들어 그 뜻을 물어보기로 했다. 하릴 없이 TV만 보던 주인아저씨에게 나는 알부민 양철통을 방의 재떨이로 놓으셨던데 혹시 간이 안 좋으시냐고 건강을 묻는 것으로 운을 땠다. 곧이어 '달방'에 관해 물었다. 대화가 오가던 중에 인상 깊게 남은 한 일화를 들었다.

 내가 그 여관에 머물기 얼마 전 작은 소동이 있었다고 했다. 어느 젊은 여자가 글을 쓴다며 달방을 구해 들어왔다. 젊은 여자 혼자 장기 숙박을 한다는 것이 공연히 마음에 걸렸지만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며칠에 한 번씩은 슈퍼에 오가는 것을 보고 주인아저씨는 안심을 했다. 그 여자는 한 달을 다 채우지 않고 24일이 되던 날 짐을 챙겨 여관을 나갔다.

 그런데 여자는 혼자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인근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던 남자친구와 함께였다. 여자의 남자친구는 외박을 나왔다가 어떤 이유 때문인지 부대로 복귀하지 않고 애인이 얻어놓은 여관방에서 24일을 머무른 것이었다. 남자는 곧 헌병대에 자수를 했고 여자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그들이 보냈을 스물하고도 나흘의 시간을 생각했다. 삼일장을 치르는 요즘 같아서는 사람이 여덟 번 죽을 수도 있는 긴 시간이었다. 그들의 처음 2, 3일을 생각할 때는 불안함이 머물렀다. 이어 4, 5일 정도에는 젊은 연인의 다정한 몸짓을 생각했고, 일주일이 넘어서는 곁에 늘 머무는 것들을 대할 때 우리들이 보이는 안일한 태도를 더올렸다. 숯불에 구운 고기가 먹고 싶었고 흰살 생선을 맑게 끓인 탕도 생각났다.

 보름쯤 지났을 때 그들이 머무는 방은 중력이 없는 우주공간처럼 떠다녔다. 20일이 넘어설 때 그들에게는 다시 불안이 찾아왔고 거기에 지루함과 비루함 같은 감정이 더해졌을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24일째를 맞았다. 그들은 방에 나왔고 나도 그 상상의 길에서 걸어나왔다. 우리는 모두 지쳐 있었다. - 84~87page, [사랑의 시대]

 

 장마가 지났다는 일기 예보를 듣고 여름 내내 가방에 넣고 다니던 작은 우산을 집에 두고 나왔다. 시내 우체국에 갔다가 다시 집 근처에서 몇 개의 일을 더 보고 돌아오는 길, 보기 좋게 비를 만났다.

 이런 사소한 불운 쯤은 이제 내 생활의 일부라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을 타기에는 애매한 거리라 그냥 걷기로 했다. 빗줄기는 생각보다 드세졌다. 아니 세상이 끝날 것처럼 내렸다. 처음에는 비를 조금이라도 덜 맞아볼까 비닐 소재의 가방을 머리에 이어보기도 하고 길가를 두리번거리며 어디 쓸 것이 없나 찾아보았다.

 하지만 금세 내 몸은 더 젖을 것도 없이 흠뻑 젖었고 나는 비를 피할 생각을 그만 두고 그냥 걷기로 했다. 고민할 필요가 없을 만큼 비를 맞은 것이 차라리 후련했다. 

 그즈음 나에게는 온통 마음을 쓰며 고민해도 잘 풀리지 않던 일이 하나 있었다. 일이 변모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면과 가장 아쉬운 장면 사이에서 한없이 어지러웠다.

 그러다 나는 가장 좋은 장면은 머릿 속에서 지우고 가자 아쉬울 장면만을 떠올리기로 했다. 한참을 그리다보나 그것이 꼭 아쉬운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빗길을 걸으며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도 잘 접어두었다. 어차피 우산으로 막을 수 있는 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는 더 쏟아지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 118~119page, [우산과 비]

 

이제 박준의 시로 접어들어 볼 때다. 시집은 기형도 시집 이후로 거의 15년 만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