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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藝術의 뜰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를 위하여 - 김승옥, '무진기행'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질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 '무진기행' 중에서





어떤 무엇이든간에, 빈틈 하나 없는 대상을 만나면 두려워 움츠러 든다. 죽어도 깰 수 없을 것 같던 슈팅게임의 끝판 대장을 대할 때의 버거움. 연휴가 끝나고 일터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김승옥의 단편은 연속 두 편 읽기에 힘이 부칠 정도로 버거웠다.

누굴 기다릴 때나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린 대형서점에 들어가 눈에 띄는 제목이 있어 충동적으로 몇 권의 책을 구입했다. 불행하게도, 그 책들은 저자의 훌륭한 의도와 기획과는 달리 조잡하고 군더더기에 가득찬 실망스러운 문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던 차, 집어들었던 김승옥의 '무진기행' 단편집은 몇 편의 실패를 겪고 조심스럽다 못해 소심한 내가 고등학교에 실리는 검증된 글이라는 이유로 구입하게된 책이었다. 결과는? 어찌 이런 보물같은 책을 몰랐던가하는 안타까움과 기쁨이었다.

김승옥은 1960년대, 황량한 도시 서울에 살고 있는 인간 군상의 다양함을 여러 가지 문체의 시도로 보여주고 있다. 유년기를 전라남도 어딘가에서(저자는 순천 출생이다) 보내고 상경한 한 젊은이 - 적어도 30대의 - 가 그린 서울의 스케치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볓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대형 제약회사 회장을 장인으로 두고 있는 30대의 젊은이가 타의에 의해, 그로 인해 빚어진 자의에 의해 떠난 고향 무진에서 돌아오기 전, 잠시 연민과 애정을 품었던 여인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의 한 대목이다. 서울을 그리워하는 그녀와, 서울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함께 교차하며 어쩔 수 없이 둘 모두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차나 한잔'에서 만평을 그리는 이나, '서울, 1964년 겨울'의 세 인물 모두 60년대와 2000년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득 담아내고 있다. 이들 모두 사회에 발디딘 20대 중 후반 우리의 모습이다.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를 투쟁하며 냉소와 고독으로 뒤덮인 도시의 삶, 탈출하고 싶지만 탈출할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어떻게 이렇게 절묘하게 담아낼 수 있는지...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세계적인 도시 서울의 슬픔과 애연을 이 책을 비추어 투영할 수 있었다.

(미디어몹 : 2007/09/27)


  1. 하늬 blog 2007-09-28 00:43

    무진기행을 처음 집어들었던 것은 중학생 때... 아마 30%도 이해하지 못하고 덮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야간자율학습시간(과연 야자시간에 자율적으로 학습하는 학생은 몇%나 됐을까요?), 저는 정석대신 무진기행을 풀고 있었죠. 감시하러 다니던 문법 선생님께서 저를 혼내는 대신 좋은 글이라며 열심히 읽어 보라고 하고 가셨습니다. 원래는 '소설'책은 압수당하는데 말이죠.

    대학생 때 술을 잔뜩 마시고 어지러웠던 다음 날 아침, 해장국 대신 무진기행을 집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해장이 되는 대신 안개에 더 취해버렸지만요.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있답니다. 김수용 감독 신성일, 문정희 주연의 <안개>라는 1967년 영화인데요. 이 영화에 삽입된 정훈희의 '안개'라는 노래도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물론 소설만큼은 못하지만 신성일과 문정희의 그림은 꽤 어울렸지요. 고뇌하는 신성일과 음악선생 문정희의 아름다운 모습도요..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문장이 참 좋았습니다. 저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1. 음유시인 blog 2007-09-29 15:50

      저도 무진기행의 분위기와 이미지에 취해, 저렇게 두서없는 글을 긁적이게 되었군요. 정말 취했다는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다 읽고나서 머리가 어질어질 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