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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선생





1.

어제 오에 겐자부로 선생님 강연회가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강연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서성인 사람만 대략 100명 가량 됐을 듯. 우리나라에서 공부하고 있는 일본인들이나 재일교포들도 많은 것 같았다.

선생님은 무엇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든지,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을 비판하고 대안을 고민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 온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은 그저 명성에 기대 별 생각없이 온 것 같기도 했다.

인간과 사회, 문학과 역사, 인문주의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크게 흥미있지 않은 강연이었으리라... 나도 선생님의 말씀을 통역없이 전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연에 계속 집중하지는 못했다.


2.

선생님께서는 많은 열려있는 진보적 지식인이 짚어감직한 말씀을 죽 해 주셨다. 아주 감동깊고 공감할 수 있었지만,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들이란 얘기다. 그 중에서도 나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가 인상깊었다.

한 질문자가 이렇게 물었다.

"지금 일본의 우경화의 근간엔 전전(戰前)에 횡행했던 침략적 민족주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선생님은 이런 일본의 우경화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분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경우 남북한 대화가 상당히 진척되고 있고, 그 대화 가운데에는 민족적 동질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바탕에 깔려있다. 이런 네셔널리즘(민족주의)은 긍정적이라고 보는데 평소에 네셔널리즘에 대해 일관된 비판을 해오신 선생은 긍정적 민족주의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계신가"

선생님은 아주 단호하게 "민족주의에는 파지즘의 씨앗이 들어있다"로 시작하셨다.

민족주의는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한국에서 남북한 화해 노력은 분명히 긍정적으로 민족주의라고 볼 수 있고,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을 긍정적 민족주의의 발현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이것들은 항상 일시적인 힘을 발할 뿐 결코 영구적인 가치를 지니진 못한다는 것이다.

'민족'에 들어있는 배타성과 울타리는 거시적 차원에서 배제와 추방을 내포하고 있다. '민족주의'는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지만 선생님께서는 그것이 긍정적인 외양을 갖고 있든 일본 보수층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모습이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신 점은 꽤 깊이 생각해 볼 만한 것이었다.


3.


대담회에서 한 재일교포 친구의 발언도 인상깊었다.

그 질문한 여학생은 나도 아는 친구다. 그녀는 재일 조선인으로서 재일교포와도 다르다. 민단 쪽에 있는 재일 교포는 '재일 교포'지만 조총련 계열의 한국인은 '재일 조선인'으로 불리우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지금은 일본에서 자유롭게 국적을 선택할 수 있게 변했지만, 아마 그녀 집안에서 풍기는 기본적인 향기는 남한 보단 북한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녀는 일본에서 조선인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고 북한말에 약간 가까운 한국어를 가정에서 배우며 자랐으며 지금은 남한의 대학에 유학와서 공부하고 있다. 선생님이 노벨 문학상 수상할 당시 연설했던 '애매한 일본의 나'를 읽으며 다른 부문이지만 왠지 스스로를 투영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도 차별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정체성에 대해 오에 겐자부로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은 '오리엔탈리즘'을 저술한 E.W.Said의 책 을 추천하시면서 답변을 대신하셨다. 학자로서 평생 서구인들에게 의해 왜곡된 동양상을 심어놓는 작업과 투쟁해 오신 사이드 교수. 팔레스타인으로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미국에서 성장해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구축된 학문적 권위의 상징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콜롬비아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그가 느꼈던 경계에 대해서 덧붙여 주시면서 말이다.


4.

물론 나는 그녀가 느꼈던 차별이라든지, 정체성의 부재에서 오는 혼란 등을 대강 머리로 짐직할 수 있어도 100% 이해할 수는 없다. 감히 내가 어줍짢게 떠드는 말이 경솔할 수 있고 불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냥 평소에 생각해왔던 '경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인식의 바운더리를 그으려고 한다. 의식적으로 열심히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대략 열려있다고 해도 알게 모르게 그러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게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세상을 월드컵 경기처럼 보는 것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팀을 응원하고 토고는 토고를 응원한다. 우리가 이기면 상대는 지고, 국민들은 열광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아주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 삶에는 이렇게 명확게 구분되지 않는 것들이 훨~씬 많다.

고이즈미가 한판 멋들어지게 망언을 퍼붓거나 아스쿠니에서 머리를 조아리면 괜히 명동을 지나가는 일본 여성이 얄미워보이는 것들... 고이즈미는 일본 정부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명동에서 쇼핑하는 일본 여성은 결코 '일본'이 아니다. 마치 조지 부시가 미 대통령이라고 해서 캘리포니아 어디 살고 있는 John이 미치광이 파시스트가 아니듯이 말이다.

내가 갖고 있던 경계 긋기 중엔 이런게 있었다. 한 때 난 경영학을 혐오했었는데, 경영학은 돈 버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경영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전노고, 특히 기업인들은 대가리에 돈 밖에 없는 인물인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지는 경영학과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 범위가 넓어질수록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오에 겐자부로 선생님께 '정체성'에 대해 물었다. '정체성'.

'정체성'은 바운더리 안에 안전하게 들어있는 자들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꼭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뭔가 구획된 틀을 강요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혹 '정체성'이 필요하다면 타인에게서 부여받는 정체성이 아니라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북한 뉘앙스를 쓰고 일본에서 공부한 뒤 남한 대학에 다니는 'A'는 정체성 없는 인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다른 독특한 정체성을 확립했고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더 값진 거라고... 다른 사람이 얽매여있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 넓은 시각과 시야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노라고 말이다. 마치 팔레스타인인으로서 미국 대학에 공부했기 때문에 오리엔탈리즘의 실체를 파해칠 수 있었던 업적을 남긴 E. 사이드 선생처럼 말이다.

값어치 있는, 남들과 다른 정체성 때문에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제 당하거나 소외 당한 기억이 있다면 고통스럽겠지만 이겨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내가 오랜 고민 끝에 취직하기로 결심하면서, '인문학적인 감수성과 관심을 결코 놓치지 않는 비즈니스 맨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혹시 내가 꿈꾸고 있는 샐러리맨의 상이 일반적인 셀러리맨이 가진 가치관과 틀에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는 거라면, 난 기꺼이 그 경계에 서겠다.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즐겁게, 경계에 서 보지 않겠느냐고
다른 사람의 방식을, 다름을 조금 더 존중해주는 사회 분위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굳이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울타리에 들어가려고 굳이 발버둥치지 말고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추방하지 않는 공간을 꿈꾸며
노력하면서 함께 해 보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다.

(미디어몹 : 2006/05/20)


  1. 말리 blog 2006-05-20 11:19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인간으로서 유효 댓글은 못 달고 사라집니닷, 그렇다고 제가 별 생각 없이 이 글을 읽었을까욤? ==33=333

    1. 음유시인 blog 2006-05-20 12:43

      역시... 그 구절을 넣을까 말까, 쓸까 말까 하다가 '명성에만 기대어 부화뇌동으로 온 사람들이 많더라'는 뉘앙스를 조금 흘리고 싶어서 넣었지요. 하지만 역시 그 어귀는 삭제하는 편이 훨 낫겠네요...

      사실 저도 장편소설 한 편, 단편 몇 편, 에세이 한 두 자락 읽어 봤을 뿐입니다. 인터넷에 쉽게 구할 수 있는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 하구요~

      말리님~ 지웠으니 유효 댓글 꼭! 달아주세요~~ T.T

    2. 말리 blog 2006-05-22 12:34

      켁! 그것 없느니깐 진짜 쓸 이야기 없뜸 ==33=333

    3. 말리 blog 2006-05-22 12:39

      어떤 직장에 들어 가실지 매우 궁금하네요. 준비 중이시겠지요. 어디든 처음에는 그 상황과 위치에 열중하시길 바래요. 시간이 지나고 주위가 차츰 또렷하게 보이거나 일에 슬슬 꽤가 날 때가 되면 아마 스스로 새로운 행동 방식을 찾으실 거예요. 목숨을 걸 필요도 없지만 미리 경계할 필요도 없으실 거예요. 그건 아무리 사소하다해도 그것 나름대로 한번 빠져 볼 어떤 가치가 또 있다고 생각되요.

    4. 음유시인 blog 2006-05-23 20:52

      '목숨을 걸 필요도 없지만 미리 경계할 필요도 없으실 거예요. 그건 아무리 사소하다해도 그것 나름대로 한번 빠져 볼 어떤 가치가 또 있다고 생각되요'
      -> 님이 말씀하신 이 사실을 안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요~ ^.^ 다행이 지금은 완전 숙지했음! ㅎㅎㅎ

  2. 정통고품격서비스 blog 2006-05-20 13:43

    '만년원년의 풋볼'과 '핀치러너'를 읽었는데, 하루키와는 비교할 수 없었어요.
    (글고 보니 미뎌몹에서 구 줄라이에게서 얻었었네요. 구 줄라이는 신 줄라이에 우울한 깊이가 있었네요.)
    이상하네요. 오에는 징용된 재일 조선인들, 조선인촌에 대해 일관되게 그립니다. 그리고 그것때문에 반한감정이 있다고 종종 비판받기도 했잖아요, 김지하류가 이런 비판을 주도한 듯 한데. 얼마나 적절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만.
    오에는 아주 겸손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닌데 그런 식으로 읽혔다면 사과하고 더 노력하겠다고 굽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이즈미와는 대조적이죠. 하지만 글쎄요. 사실 재일 조선인을 주목하는 작가까지 싸잡는 이런 종류의 오에 비판은 반일 내셔널리즘 정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경망스러웠어요. 이상한 것은 오에는 어쩌면 이런 반일감정을 비판하지는 않았군요. 책에 나온대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정당"하기 때문인가요? 솔직히 우리가 일제 치하의 직접 피해자도 아니면서 열등감 보충용으로 반일감정 이용하는 건 그닥 정당해 보이지도 않거든요.

    1. 음유시인 blog 2006-05-21 01:18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3. 정통고품격서비스 blog 2006-05-20 13:53

    샐러리맨이란 그냥 월급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회사와 계약한 자겠죠. 회사가 이 사람이 놀기를 원하면 놀면 되는 거구요. 원칙적으로 샐러리맨의 상이란 없는 거죠. 근데 샐러리맨의 전형이 등장하는 것은 회사가 개인에게 부과하는 조직원으로서의 상이 어느 정도인가인가의 문제인데, 대기업처럼 체계화된 거대 조직일 경우 어떤 상이 필요하고 존재하는 게 맞죠. 하지만 이 경우에도 삼섬 마피아, 대우 날품팔이, 현대 무대뽀가 되는 것이지, 일반적인 샐러리맨이 되는 건 아니죠.
    우리나라는 전형적이고 표준적인 샐러리맨 스테레오 타입은 없는 것 같거든요. 회사따라 업무따라 달라요. 군대도 보직따라 분위기 다른 것처럼요. 특히 대기업, 중소기업, 벤쳐기업, 벤쳐중에서도 연구소 형식, 의기투합형식, 젊은오너일 경우, 경영권이 단단한 경우, 어지럽게 분산된 경우, 권력이 영업에게 있는지, 기술에 있는지, 투자자에 있는지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요.
    그러니깐 세상에 샐러리맨과 비샐러리맨의 경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심지어 대학생일 때도 조직이나 체계가 부과하는 인간상이 있는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도 부과되는 정체성이란 있는 것이니까요. 나름대로 한계 내에서 맘대로 살 수 있는데요, 그러려면 일단 조직이 옅은 데로 가야되요.

    1. 음유시인 blog 2006-05-21 01:20

      샐러리맨과 비샐러리맨의 경계라기 보담도... 왠지 우리 샐러리맨 아버지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뭔가 상(像)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제 머리 속에 깊이 박혀있었던 거 같습니다.

      다행히, 전 지금 그런 상에서 아주 자유롭게 됐지만요. 일단 부딪혀봐야 알 일이죠~! ^.^

  4. DK 2006-05-20 17:28

    > '민족'에 들어있는 배타성과 울타리는 거시적 차원에서 배제와 추방을 내포하고 있다. '민족주의'는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지만 선생님께서는 그것이 긍정적인 외양을 갖고 있든 일본 보수층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모습이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신 점은 꽤 깊이 생각해 볼 만한 것이었다.

    민족주의는 한국에서는 의외로 자칭 보수건 자칭 진보건 아킬레스 건입니다.
    (이 인간들이 진짜 보수인지 진짜 진보인지 아닌지 저로선 헛갈려서 자칭이란 말을 씁니다.)
    민족이라는 개념에서 자유로운 한국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자칭 진보의 경우를 봐도, 독도 문제에 대한 민노당의 대응이랄지, 조선족이 동포니까, 북한 인민은 동포니까 어쩌구 하는 얘기들이랄지 많습니다.
    반면 보수도 뉴라이트의 이영훈 교수는 "민족"이라는 용어에 다소 부정적인 거처럼 보이더군요.

    1. 음유시인 blog 2006-05-21 01:26

      예, 역시 쉽지 않은 문제죠. 오에 선생은 거시적 차원애서 인류애와 인권, 민주주의를 국지적 '민족'의 문제보다 중시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로 '민족'울타리는 선생님이 평생 풀려고 하신 화두가 아니었을까요?

  5. 차탈래부인 blog 2006-05-20 21:59

    오래 전에 누군가가 제게 자신은 '주변인'으로 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중심에 있으면 볼 수 없는 걸 주변에 있으면 바라볼 수 있다면서... 그러면서 '너바나' 그룹의 '커트 코베인'을 예를 들더군요. 경계인이란 주변인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지만, 어쨌든 편협하거나 고정된 시각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통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마치 미국의 촘스키처럼,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득권에 연연해 하지 않는, 행동하는 지성이라고 생각됩니다. 만나보셨다니... 부럽군요.

    1. 음유시인 blog 2006-05-21 01:21

      만나봤다기보다 멀리서 강연을 지켜봤을 뿐이죠... '주변인'으로 사는 일은 꽤 가치있는 일이겠지만, 결코 편안하거나 안온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