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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Style

리더... 라






군대에 있을 때 일이다.

9월달에 입대한 나는, 풀린 군번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내 위로 9달 고참이 있고, 그 고참 위로 5달 고참 둘이 있고, 그 고참의 3달 더 고참있고 그리고 내 사수가 있었다. 아참, 난 여단 본부 인사처에서 근무했는데 전부 5명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내 사수와 내 14달 고참이 대락 5달 정도 차이나고 17달 고참은 이미 분대장이었으니 - 아 복잡하다, 하여간 내가 자대갔을 때 한명빼고 다 병장이었다. - 대략 일병 달고 얼마 지나지 않나 이미 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에 서게 되는 몸이었다.

많은 사람이 나보고 땡잡은 놈이라고 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내 밑으로 줄줄이 후임병들이 들어온다는 얘기도 된다. Anyway,

시간을 흘러 두 달만에 벌써 사무실에 후임병이 들어왔다. 인상이 그리 썩 좋지 않은 녀석이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그 녀석이 후임병으로 뽑혔다.

지금 나는, 내가 생각해도 성격이나 세계관이나 사람을 판단하고 대하는 게 군대 가기 전과 아주 많이 달라졌다. 많은 영향이 있겠지만 아마 가장 내 세계관을 바꿔 놓은 인물이 바로 이 '두달 밑' 후임병이 아닐까 한다.


자기 성격을 자기가 어떻다고 하는게 얼마나 부정확하고 주관적인지는 알고 있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는 '내가 하는 만큼, 혹 그 이상을 꼭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꽤 자상하고 부드러우면서도 항상 예의 있는 행동을 강요하신 부모님 때문인지 다른 사람, 특히 연장자나 윗사람에게 깍뜻하게 대한다. 대학 입학했을 무렵 1년 선배에게도 항상 상당히 각도있는 인사를 했고, 눈이 마주쳤는데도 그냥 지나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사람(특히 아래 사람)에게도 이런 깍듯함을 바란다는 거다. 권위의식 같은 건데, 편하게 지내는 사이라도 이 사람이 후배로서 '뭔가 넘어야 될 선'을 지났다 싶을 땐 확 기분이 나빠진다든지, 선후배 없이 길길이(??) 날뛰는 녀석을 못마땅해 한다는 거라든지...

또, 나는 매사에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임해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도 있었다. 내가 이 정도 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이 정도 하기를 항상 바라고 있었다. 그런 역량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한 없이 잘 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심지어 '경멸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면 동아리 행사라든지, 과 행사라든지 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기 짝어 없다.


이 두 달 후임병(P군)은 이런 내 성미에 전혀 맞지 않은 녀석이었다. 인상은 완전 양아치에 걸음걸이며 하는 짓에 군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눈에는 항상 개김성이 가득했다. 첫 인상이 이랬으니 나중엔 오죽했으랴...

그러나 더 문제는 이 녀석을 대하는 내 태도였다.

권의의식에 사로잡힌 나는 이 친구를 '처음에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꽤 호되게 대했다. 조그만 실수에도 심하게 질책하고 맘에 안들어하는 티를 너무 냈다. 후임병을 혼낼 수 있는 '일병' 딱지를 달자마자 더욱 심하게 그랬던 것 같다. 그랬으니 그 친구도 나를 좋아했을까? 뭐 좀만 잘못해도 X랄하고 두달 밖에 차이 안나는데 고참티 팍팍내고, 잘하려고 노력해도 맨날 무시하고 이랬으니 사이가 좋으리가 없지...  내 딴에는 후임병이 잘 되라는 마음에서 갈군게 자꾸 이 친구를 자극했던 거다. 나도 이 친구가 더 괜찮은 후임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거만하게 그 친구를 무시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내 실수가 그대로 내게 다시 돌아왔다.

대부분의 중대 일을 맡아서하는 일병 때 9월 군번이 나와 11월 군번인 P는 사사건건 의견충돌을 빚었고, 나는 내 방식을 고집하고 그는 개겼다. 시간이 지날 수록, '군대는 철저한 계급사회'라는 내 고정관념은 깨지고,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다'는 실재가 다가왔다. 교과서적인 나는 '고참이 시키면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에 굉장히 충실했다. 그러나 사실 군대에서는 절대 복종하지 않고 배쨀 수도 있다. 이미 구타와 얼차려가 사라진 군대에서 그 후임병과 뭔가 하기 위해서는 설득과 대화가 필요한데, 그 당시의 나는 그만큼의 내공이 부족했던 것이다.

내 9달 고참마저 전역하고 나니, 난 무려 상병 4호봉에 사무실 최고참이 됐다. 혹시 경험해 본 사람은 알지 모르겠지만, 짬없을 때(상대적으로 계급이 낮을 때) 왕고를 잡는 건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대부분 간부가 각급 최고참을 불러서 지시하거나 혼내거나 하는데, 간부들은 나만 찾았고 경험이 없는 나에게 너무 막중한 임무를 맡기곤했다. 그러면 나는 간부의 지시를 받고 우리 애들을 대리고 뭔가를 해야 하는데, P군의 협조를 얻을 수 없었던 거다. 이 친구는 사무실 최고참은 아니면서 결코 나에게 힘으로 밀리지 않은 2인자였고, 가장 배짱편한 위치에 있었다. 나는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P도 나의 존재 때문에 계속 불편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나는 그런 편협한 사고에 갇혀 있었다. 그래도 가끔 P군과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고, 그도 가끔 마음을 열어 나와 이런저런 얘기하기도 했으나 역시 처음 틀어진 사이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고, 왜 자꾸 그런 불필요한 감정 싸움에 가뜩이나 피곤한 군생활을 더 힘들게 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일단 내가 병장이 되자마자 바로 내 대부분의 권력을 P에게 넘겼고 상병 7ㆍ8호봉이었던 P는 나름의 카리스마로 꽤 괜찮게 내무실과 사무실을 이끌어 나갔다. - 물론 그의 후임 중에도 P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원래 이렇게 돌고 도나보다.

둘다 내무실 일에 신경 안 써도 되는 병장이 되고 나서야 서로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나도 약간 open-mined로 바뀌어서 그런지 그 무렵 우리는 큰 허물없이 지냈다. 이제 모두 전역해 사회로 나갔고, 나는 그런 군대에서 경험을 토대로 뼈저리게 스스로를 돌이키게 되었다. 고정관념이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는지, 열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게 왜 소중한지, 권위와 억압으로 다른 사람을 다스리려하는 것이 왜 좋지 않은 방식인지 등을 말이다.

내가 나름대로 군대에서 배운 것들이라면 이런 것들일 터... 그래서 나는 군대에 가는 걸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쨌든,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 않은 맘 편한 사람이 됐다.
자기에게 엄격한 것과 다른 사람에게 엄격한 건 이제 대강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P군이 생각나고 고맙기도 하다. 그가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똥꼬집에 고정관념 투성이에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재수없는 인간이었을 테니 말이다. 아마 내가 조금이나마 성숙해졌다면, P군의 덕이 아주 클 것이다.

(미디어몹 : 2008/03/04)


  1. 말리 blog 2006-03-04 11:55

    1뜽!!
    소곤소곤 (그래도 연장자에겐 깍듯하게 쭈~욱 대하시길 ㅋㅋㅋ ===33=33)

    1. 음유시인 blog 2006-03-05 11:37

      울트라 캡쑝 매너쟁이가 될라요~ ^.^ ㅎㅎㅎ

  2. 정말 2006-03-04 13:39

    군대 잘 다녀오신거 같습니다. ^_^ 윗 사람도 아랫 사람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고 대하는게 가장 좋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끄는게 아니라 따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라고 봅니다. 타인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하라. ^_^

    1. 음유시인 blog 2006-03-05 11:38

      역시 경험으로 느끼는 것과 막연히 생각하는 건 다르더군요~ 아무리 그럴듯한 말이라도 스스로 터득하고 뼈저리게 느끼지 않으면... '타인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하라' 아주 중요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