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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藝術의 뜰

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 - '칼의 노래'






수능 끝나고 한창 놀던 때, 스타크래프트에 빠졌다. 주로 테란으로 했는데, 지금은 아주 인기있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테란은 최악이었음. 기본 전투 유닛이 마린이었는데 아무리 싸다고 해도 질럿과는 쨉도 안되고 한번에 두마리씩 나오는 저글링에게도 상대가 안됐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테란을 고수하며 게임하고 있는데, 언젠가 마린 하나를 클릭해서 정찰보내고 나서 살짝 '내가 저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마린이라면 어떤 느낌일까'고 생각해보았다. 물론 이내 지워버렸지만.

2~3년 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생겼다. 건강한 대한민국의 '시민'이 한 순간 '병력'이 되버린 순간. 훈련이라는게 '지시대로 움직이는 연습'의 반복이므로 언젠가 국지도발 상황이든 전면전 상황이든 전쟁이 터지면, 내가 마린을 찍어 적 기지로 보낸 것처럼 우리 지휘관이 나에게 돌격하라고 명령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내 자신이 '물화(物化)'되는 것을 실감했다. 마린 뿐이랴? 질럿이든 저글링이든 우리는 승리를 위해 도구화되는 물질이 된다. 그건 명령을 받는 병졸이든 명령을 실제화하는 중간 지휘자든이든 최종명령을 내리는 사령관이든지 마찬가지다.

많은 전쟁이야기들은 '전쟁'을 이야기한다기보다 '전술과 전략'을 보여준다. 어떤 영웅이 어떤 전략을 써서 어떻게 적을 무찔렀는지. 중학교 때 '삼국지'에 완전 미쳤을 때였다. 조운이 장판파에서 유비의 아들 '아두'를 품에 안고 조조군 사이를 무인지경하듯 가르며 적을 베는 장면에서 감탄할 때, 나는 주군의 아들을 품고 달리는 조운에게만 시선이 꽂혔을 뿐, 추수할 때 베어지는 볏단처럼 쓰러지는 조조의 졸개들을 바라본 적이 없다. 병졸의 죽음과 관우의 죽음은 이름없는 한 민초의 죽음과 영웅의 죽음일 뿐, 둘의 개별성은 차이가 없다. 우리들은 영웅의 죽음에 너무나 큰 의미를 둔 나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주변화시켜버린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이 백의 종군 시작한 후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이야기를 담고있지만, 결코 전쟁, 혹은 인간사의 개별성을 놓치지 않는다. 무력한 조정, 혼란한 국제 정세.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 그 속에서 온몸으로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사내의 고뇌와 고독이 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김훈'은 이순신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건 어쩌면 굉장히 위험한 작업일 수도 있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에 김훈이 들어가기도 하고 김훈이 이순신의 몸을 빌려 얘기하는 작업은 김인환 선생님의 말처럼,16세기와 21세기의 시간적 간격을 뛰어넘어 평범한 문필가로서 민족 사표를 연기해야하는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훈은 이순신의 몸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서 결코 영웅이 되려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방식대로 사유하는데, 무인(武人) 이순신의 몸을 빌렸을 뿐이다. 그럼으로서 영웅이 아닌 우리는 영웅이 했던 평범한 고뇌에 더욱 밀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이 영웅적인 삶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다른 책보다 훨씬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다.

원래 김훈의 문장은 장황하지 않다. 가끔 만연체로 쓰는 경우가 있으나 화려한 수식을 위해서라기보다 호흡을 조절하기 위함인 듯. 접속사를 배제하고 팩트(fact)를 절묘하기 밀어내며 보여주는 김훈의 문장을 원래 난 좋아했지만, '난중일기'에서 충무공의 문체도 그러하다고 한다.

활자매체를 영상매체로 바꿨을 때 간극과 내면을 영상으로 담기 힘들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불멸의 이순신'은 정말 조악하다. 적과 나를 구분해 적을 '절대 악'으로 나를 '절대 선'으로 놓는 이분법은 이런 도식에 익숙해 있는 4~50대 아저씨들에게 어필하기 좋은지 모르겠다. 아마 독도 문제와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절정에 이른 한일관계도 한 몫했을 수도... 그러나 사람 살아가는게 별로 그런 도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나는 인생과 전쟁의 총체성을 상실한 불멸의 이순신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그런 도식없이 시청률을 올리기 힘든 현실을 깨닿고 어쩔 수 없이 시나리오를 수정했다는 방송작가들에게도 애도를 표한다.

(미디어몹 : 2006/02/22)

  1. 말리 blog 2006-02-22 13:14

    옛날에 썼던 독후감인데 생각이 나서 붙여 보니닷 ㅎㅎ

    1.
    나는 김훈을 몰랐다.
    어느날 대통령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우리에게로 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로 알았다.
    그것도 촌스럽게 이순신을 들고서...라 생각했다.

    단아해서 더욱 단호한 그의 문장을 읽으며
    나는 대통령에 대한 선입견 하나를 버렸다.
    놀랍게도 칼의 노래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김훈의 차가운 검날엔
    깊은 절망의 수사도 절절한 아픔의 수식도
    깨끗하게 베어져 나갔다.
    천금의 무게로 절제된 말과
    삶을 두고 그 너머의 죽음을 응시하는 눈빛은
    너무나 깊고 아파서
    나는 오히려 그 문장에 몰입할 수 없었다.
    김훈은 완벽하게 이순신 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지러웠다.
    머뭇거리는 작가도, 변명하는 작가도 없는 소설은
    소설 아닌 소설인 듯 울렁거렸다.

    1. 말리 blog 2006-02-22 13:15

      2.
      칼의 노래는 의금부에서 풀려나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의 명량해전으로 시작하여, 그의 마지막 바다 노량에서 끝난다.
      그러나 끊임없이 죽고 죽이는 그 싸움에서 이순신이 본 것은 무엇이었는가...
      아지 못하지만 김훈의 이순신이 내게 남긴 것은 이러하다.

      「명량에서, 나는 이긴것인가...
      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 있는 몸의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이순신에게 자신은 늘 적의 적일 뿐이었다. 죽은 적의 칼을 들여다 보며 그 칼이 뿜어내는 적의의 근원을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늘 그는 적의 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선명하게 드러난 운명이었다.
      동료의 시신을 옮기는 포로들의 울음을 보면서 이순신은 허리에 찬 환도가 무거웠다.

  2. 말리 blog 2006-02-22 13:15

    「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 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 이었다...
    나의 적은 전투 대형의 날개를 펼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 달려드는 적의 집단성이기에 앞서,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적의 개별성이었다.
    그러나 저마다의 울음을 우는 개별성의 울음과 개별성의 몸이 어째서 나의 칼로 베어 없애야 할 적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적에게 물어 보아도 적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 」

  3. . 2006-02-22 13:21

    니가 배가 불러서 드라마에 몰입을 못해서 그런거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단순해서가 아니라.

    너는 지금 이순신도 타자화, 야만적인 왜병들도 타자화해서 둘 다 똑같은 인간이려니 이런 배부른 시각으로 바로 보고 있어서 '절대' 선과 악이 있겠나~이 지랄하고 있다.
    당장 니 방에 미친놈이 칼들고 뛰어들어와 니 배를 가른다 생각해봐라. 이 놈도 지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겠지~하면서 '조악'하지 않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을거 같냐?
    김훈의 이순신은 전장에서 닳고닳았기에 나오는 범상치않은 전쟁관을 가졌을걸로 그릴 수도 있어도 니처럼 개나소나 적과 나의 관계를 초월하는거..같잖다.
    실제 세계를 이해를 못하면, 이해를 하기 싫으면 잡념은 니 머리속에만 담아둬라.
    그나마 글이 견고해서 찍-한번 싸주고 간다.
    감사해라.

    1. 음유시인 blog 2006-02-22 14:12

      배가 불러서 드라마에 몰입 못한 건 아니고, 그냥 재미가 없어서 재미없게 봤습니다.

      '적'과 '나'의 관계라... 나에게 칼 들고 뛰어오는 적군과 '적군'에게 나에게 칼 들고 뛰어오라고 명령한 인물 -> ex) 토요토미 히데요시 은 분리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뛰어오는 적의 칼을 '부처님'처럼 앉아 있어서 받아야 된다는 건 아니고, 다가오는 적은 받아쳐내야 하겠지요.

      나에게 칼을 겨누는 자와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초월할 수 있겠습니까?
      전 실제 세계를 이해 못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실제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2. 음유시인 blog 2006-02-22 14:14

      님의 리플을... 솔직히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 맥락에 대한 반발은 못하겠고 님의 몇 가지 어설픈 표현 중에 오해할 만한 소지가 있는 것만 때와서 변명 몇 마디 했습니다. 별로 감사하지는 않구요. 담 부터 악플달 때는 무슨 소린지 조금 알기 쉽게 써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