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씨 이야기는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러가야 한다. 2000년대 초, '이진경'은 문사철 공부를 하게 되면 빠지지 않게 입에 오르내리던 학자였다. 들뢰즈, 라깡등 서양 인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로도 유명했고, PD계열 학생운동의 이론가로도 알려 있었던 분이었던 것 같다. 그 무렵에는 이진경이 가명이란 것도 몰랐고 여자분인줄 알았는데, 사실 본명은 '박태호'이며 남자분었다!
아무래도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자주 절에 다니고, 고즈넉한 산사의 향 냄새를 좋아하여 불교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30대 회사 생활을 하면서 실적과 감정의 굴곡이 심한 업무를 맡게 되다보니 아무래도 심정적으로 기댈 것이 필요했었는데 그 때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팟캐스트와 유튜브 등으로 많이 들었다. 출퇴근 할 때 이따금 듣기도 했지만, 머리가 아프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걷거나 달리면서도 많이 들었다. 세상사 이런 저런 고민을 불교적 가르침을 기반해 해석하여 쉽게 알려 주시는 법륜 스님의 이야기는 큰 위로가 되었다.
40대가 되니, 법륜 스님이 해 주는 말씀보다 더 깊이있게 불교 철학을 이해하는 기회를 찾게 되었고 집근처 사찰에 정기적으로 다녀볼까 생각도 해 봤다. 불교방송 유튜브등을 좀 뒤져도 봤는데, 좀 졸리게 가르치는 분들이 많아서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도서관에서 '불교'라고 입력해 보다 이 책을 발견하였다. 이진경과 불교는 언뜻 낯설게 느껴지는 조합이었는데 책 초반에 이진경 선생이 어떻게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적어 두었다.
"약 10여 년 전, 함께 공부하며 일종의 지식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던 친한 후배들과 크게 다툰 적이 있다. 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 비판한 것인데, 반대로 그런 나를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거기에 이런저런 감정마저 섞여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나는 애정을 갖고 열성적으로 챙겼던지라, 그런 그들이 아주 서운했다 ... (중략)... 성철 스님이 쓰신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책을 보다 보니 번뇌를 벗어나려면 앉아 좌선을 하면 되나보다 싶었다. 하여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번뇌가 사라지기는 커녕 더욱 더 치성하여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가슴이 울렁대서 앉아있기도 힘들게 되었고, 안 되겠다 싶어 관악산으로 산책을 갔다. 가는 중간 약수터에 평상이 있었는데 무심코 지나가다 깜짝 놀랐다. 거기 누워있는 생면부지의 노인네가 심한 욕설을 퍼부어댔기 때문이다.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나 말곤 그 욕을 먹을 사람이 없었던 셈인데, 욕먹을 짓을 하지 않았으니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왜 그러시나 하고 다가갔는데,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떠돌고 있는 노인의 시선이었다. 그는 내가 아니라 허공에 대고 욕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섬뜩한 느낌이 전신을 관통했다 .아, 조금 전까지 내가 저러고 있었는데! 다른 거라고 저 노인은 입 밖으로 내서 하는 걸 나는 입 안에서 하고 있었다는 것 뿐이었다. 나도 미움에 눈이 멀어 정신이 나가 허공에 뇩을 하고 있는 중음식(사람이 죽은 뒤 명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노는 혼령)이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얼른 몸을 돌려 다시 내려가서 동네 미용실을 찾아 들어갔다. "아주머니, 머리 좀 밀어주세요", 놀라서 말리는 아주머니에게 거듭 부탁하여 머리를 빡빡 깎았다." - page 140 ~ 141
더 반가운 건, 이 책에 담겨진 내용을 이진경 선생이 강의한 유튜브도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책의 내용도 그렇게 쉽지는 않은데 이 유튜브 강의에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계시다. 나는 이 책의 한 챕터를 읽고 유튜브 한강을 듣는 방식으로 공부했는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관심있는 분들에게 이 방법을 추천해 드리고 싶다. 이 책은 빌려서 보기는 했지만 다른 분들께는 구입해서 두고두고 읽어봐도 좋다고 권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20YfXegh5v0&list=PL5WMTtfpXrfsJY8B-UZnbhAf29wpthYm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