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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藝術의 뜰

김영하의 도쿄와 유쾌한 무관심 - '김영하여행자도쿄'


1.

<김영하여행자도쿄>는 한눈에 여행기, 혹은 여행에세이 같다. 물론 나 역시 그럴 줄 알고 책을 집어들었지만,
이는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리다. 내가 해석한 이 책은 다음 세가지로 읽힐 수 있다. 각 음절별로

- 김영하여행자(혹은 여행자김영하) / 여행자도쿄(도쿄여행자) / 도쿄김영하(김영하도쿄) -

즉, 김영하/ 여행자/ 도쿄, 를 마음대로 자유분방하게 섞어놓은 글 모음책 - 및 사진 모음책 같은 것.

책의 구성은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Short Story]는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한 한 여성이 대학원시절 짝사랑한 일본유학생을 도쿄에 와서
만나는 짧은 소설이다. 두번째는 도쿄의 풍경을 담은 사진과 짧은 코멘트를 담은 [Eyes wide shots in Tokyo],
마지막 [Essays]는 도쿄와 여행, 그리고 스스로를 담은 에세이 모음이다.



2.

요즘 직장생활에서 개인적인 변화를 겪으며, 기대했던 대로 결과를 이끌어 내지 못하면서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좌절감은 체념이 되고, 체념은 이내 무기력과 의욕상실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나는 마음먹은 일에 상당히 에너지를 쏟는 타입으로서 항상 긍정적이로 진취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이 정도의 무기력감은 서른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름 고비고비도 있었고
선택과 결단의 시기에 잠 못 이룬 때에도, '힘들다'느낀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뿌리채 상실한 시기도 없었던 것 같다.
 
- 어떻게 보면 나는 항상, 무엇을 어떻게 하든 목표와 방향을 세워놓아야 하는 유형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

이 무기력과 의욕상실이란게 무서운 것이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하는데, 점점 깊이 파고들면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집어든 이 책은 요근래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하게' 만드는 의지를 심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대해서든 나 자신에 대해서든 '쓰고 싶다', '말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어떤 평가를 받든지 간에 나에게는 개인사적으로 퍽 중요한 책인 셈이다.


3.

아주 가볍게 예전 일본여행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키워드 검색을 했고 무수히 많은 - 정말 개나 소나 다 쓰는 -
일본/ 도쿄 여행기 속에서 나름 검증받은 작가 김영하의 솜씨를 보고 싶어 첫 장을 펼쳤다. 당연히 키워드, 혹은 지역을
기반으로한 에세이부터 시작할 줄 알았는데, 짧은 소설로 오프닝을 열었다.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 소설은 자연스럽게 도쿄의 장면과 글모음으로 이어주는 힘을 갖고 있었다.

에세이 중에서 특히 '롤레이 35'라는 구형 필름카메라를 소개하는 장이 기억에 남는다. 김훈이 자전거와 연필을 통해
얘기하는 아날로그의 기쁨 못지않게 훌퓽한 묘사인데, 김훈 만큼 강렬하지 않지만 역시 그만큼 힘들여 읽지 않아도 되는
매끄러운 문장이다. 여행과 거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앎'이라는 에세이도 참 괜찮다.

이렇게 처음 만난 작가의 문장과 기분좋게 만나면서 '팬(fan)'으로서 인연은 시작되는 것이다. 무력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 소박한 감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