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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거장에서의 오후


예전 호주에서 잠시 어학연수를 할 때의 일이다.

처음 멜번에 도착해서 한달 정도 되었던 어느 날인가, 오후 수업도 없고 특별한 약속도 없어서
일찌감치 집에 도착해 책을 좀 보다가 수영이나 갈 생각이었다.

마침 집에 먹을 것도 떨어져가고, 필요하던 몇 가지 것들이 있어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두 손 가득 식료품을 들고 전철을 탔다. 멜번의 전철은 우리 1호선처럼 생각하면 된다.
지하로 다니는 구간은 적고 대부분 경전철처럼 지상으로 다니는 형태다.


한 오후 두시쯤 되었을까, 갈아타는 구간에서 내린 다음에 옆 플렛폼으로 넘어가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멜번의 날씨는 변덕스러워서 하루에도 몇 번씩 흐렸다 개였다 하는데, 흐렸다 개였을 때의
맑은 햇살을 받으면 온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정류장에는 사람도 드문드문 있고,
양손 가득한 식료품 봉지를 옆 의자에 두고 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여자 노인분이 내 옆의 식료품 봉지 건너 편에 천천히 앉았다. 그리고 나를 보더니
"좋은 하루입니다.(Good day, mate.)"라고 인사를 건냈다.

호주 사람들의 그런 태도 - 아무에게나 쉽게 말걸고 안부를 묻는 격의없음- 에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서
나도 역시 "좋은 하루입니다. 부인.(Good day, Ma'am.)"라고 인사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기분 좋게 부는 바람과
매점에서 핫도그와 커피를 사는 사람들을 느끼며
계속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계속 전철이 오지 않는데, 뭔가 빠른 영어로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잘 못 듣고 지나쳐 옆의 노부인에게 "무슨 일이죠?"라고 물어보니
그냥 "연착이요(delayed)"라고 말하고는 계속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러길래 나도 그냥, '연착이군'이라고 생각하면서 함께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리고 한시간인가(?) 더 지나서 전철이 도착했다.


요즘같이 내 마음이 전쟁같을 때며,
뭔가 계속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조급해지고 있을 때
내 마음의 어느 한 부분도 놓치지 싫어서 안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득, 호주에서의 그 풍경이 순간 머리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한 시간 반이나 연착된 지하철을 기다려도 평온했던,
그 날의 오후가 문득 절실해 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