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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Doly

열하일기를 따라서 - KBS 스페셜






국문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형이 있다. 내가 처음 비행기 타고 나간 외국은 중국이었는데, 그 영광스런 역사를 함께 했던 형이다. 고전문학을 공부하는 그는 대학원에 입학해서 다시 한 번 중국에 갈 기회를 맞았다. 교수님을 모시고 열하 지방을 탐방한 것이다. 그 형의 권유로 연암 박지원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다. 요약 번역본이었지만 문체와 내용에 탐복했던 기억이 났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헬스장에 가서 TV를 여기 저기 돌리는데, KBS 역사 스페셜에서 열하를 탐방하는 다큐멘터리가 시작하고 있었다. 채널을 고정시켜 놓고 열심히 뛰었다. 내 옆에서 열심히 뛰던 내 또래에 아가씨는 쇼 프로그램을 보면서 웃느라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쪽을 흘금 쳐다봤는데, 뭐 저런 걸 보나 하는 표정이었다.

다큐멘터리 내용도 내용이지만 충격적인 사실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청의 전신인 후금이 원래는 조선을 같은 민족의 형제국으로 인정해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년에 왜가 쳐들어왔을 때, 누르하치는 조선에 3만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 명 아닌 오랑캐 국가와 상종하지 않았던 '소중화' 조선은 후금(청)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어가는 한반도의 북쪽 끝 의주로 향했다. 조정 대신들은 외교관들을 족치며 형님의 나라 명의 원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그 간극에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어버렸는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왜란이 끝날 무렵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꿨다. 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기 위해 사신을 보내왔으나 조선은 또 수교를 거절했다. 중원으로 진출할 뜻을 품고 있던 청은 후미의 근심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하고 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의 임금은 청 칸 발 밑에서 이마를 땅에 아홉번 찌으며 조아리고 절했다. 청은 파죽지세로 중원으로 내달렸고, 명은 결국 패망했다.

호란이 끝나고 소현세자는 볼모로 잡혀 과거 청의 수도였던 심양으로 끌려갔다. 포로로 붙잡힌 조선의 백성들이 노예시장에서 팔려나가고 소나 돼지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나약함과 수치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중 언젠부턴가 심양 성 바깥의 채소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제법 큰 규모였던 모양인데, 소현세자는 여기서 번 돈으로 중국 당대의 학자, 지식인,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기 시작한다. 놀러운 서양의 기술이 청에 유입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모은 돈을 망원경, 세계지도, 시계 등 첨단 문물을 사들이는데 썼다. 놀랍도록 발전해나가는 청을 바라보면서 소현세자는 - 연암과 마찬자지로 - 몰락한 명의 영화를 그리는데 에너지를 쏟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청에 오고가던 조선의 사신들은 소현세자가 '장사에 눈이 멀고 방탕한 일을 일삼는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모를 사연으로 죽고 만다.


모든 것엔 이면이 있듯이 명의 권위와 명분에 집착하던 사대부들의 생각에도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명분의 뒤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더 발전된 사회로, 국가로 나아갈 수 있던 기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분하기 짝이 없다. 지금 그러할진데,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어떠했을 것인가. 안타깝고 슬프다.


(미디어몹 : 2006/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