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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藝術의 뜰

구본주 전시회 정리 - 성곡미술관



성곡미술관에서 관람한 故 구본주씨의 작품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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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스로, 민중 미술에 대한 재검토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중이란 개념과 계급이란 부분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작품의 모티브들을 집회 장소에서 현실 주변의 삶으로 끌여들였다. 그리고 개인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포천의 한구석, 나의 

작업장까지 전달되는 TV의 일상에서 샐러리맨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비교되면서 나의 손은 청동에서 쇠로, 나무로 그들을

묘사하고 현실의 상황들을 연출한다.



< 이 과장의 40번째 생일날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벅찬 출근] >




<비스킷 나눠 먹기>




<로또 대박2>




<미스터 리 2>





<이 대리의 백일몽>



<아빠의 청춘1>



<사생결단>



<아빠의 청춘2>



기타 제목이 나와있지 않던 작품들






당시 민중 미술이란 이름으로 대중화된 책 한 권, 그리고 그 책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교우관계가 나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로 던져졌고 지금도 남아 있는 고민을 풀기 위해 작업을 한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작업에 대한 나의 고민이란 '나는 왜 미술을 하는가' 정도였는데 이젠 한 걸음 나아가 '난 어떤 미술을 해야 하는가', '어떠한 미술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내 속에서 만의 자족적인 작업이 아닌 다른 이들을 포함해서 생각할 줄 아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난 운동권이라고 불리며 새로운 삶과 사고방식들을 접하게 되었다.... - 중  략 - 일생 일대 가장 진지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고민에 빠져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난 무엇을 해왔나, 그리고 지금까지의 활동이 앞으로의 삶에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낙선되고 외부와 고립된 시간을 보내며 작업에만 몰두했었다.



<6월>



<노동>




<갑오농민전쟁>




<파업 1 - 3>



<파랑새>



모든 고민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작업했다. 탄탄한 모델링 덕분인지 자신감 있는 작품들이 나왔고 앞으로의 진로를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생활로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졸업 이후에도 계속 작업만을 하기 위해 작업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힘든 가정 형편임을 알면서도 부모님을 졸라 6개월 만에 포천 고향 땅에 작업장을 짓게 되었다. 어려운 설득이었다. 나에 대해 걱정하고 못미더워 하시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처음으로 공모전에 출품하였다. MBC 구성조각대전에 작품을 낸 것이다. 6개월을 준비하며 두 작품을 내 놓았다. 한 작품은 입선, 다른 한 작품은 대상이었다. 그 일로 부모님의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삶에 대해 조급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고 난 후, 난 다시 조각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이젠 담담하고 차분하게...



<눈칫밥 삼십년>



<그는>



<깨소금>



<부부>



<위기 의식1>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개인전을 끝내고 마치 열병을 앓고 난 직후의 말까지 정신 속에 자신감만으로 꽉 차, 빈약했던 지난 날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며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더 많은 허점들이 느껴진다. 내 작품 앞에서 배꼽 빠져라 웃던 관람객들, 한없이 진지하게 감상하던 관람객들, 그들에게 또 다른 새로움으로 다가가고 싶다.

'민중미술이 현실 속에서 지향하는 미술의 진정한 민주화는 대중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대중미술 문화로서의 본연의 역할'이 아직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하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