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발길 닫는데로

홍콩과 영연방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폭격 때문에 영국 냄새가 나는 건축물은 많이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곳곳에서 영국의 흔적이 시스템 속에 녹아있다. 차량 좌측 통행이라든지 우리가 1층이라고 부르는 곳을 Ground floor라고 부르고, 그 위층부터 1층이라고 한다든지. 지하철과 공공장소에서 들리는 영국식 발음과 영국식 영어 표기. 건널목 횡단보도 표시에서 익숙히 들려오는 멜로디, 밀고 들어가면 또 나오는 문등... 왠지 친근감이 들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누가 영국 다녀왔는지 알겠지만, 그냥 호주ㆍ뉴질랜드에서의 경험을 빌려보면 그렇다는 거다.


2.

사실 홍콩 사람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영어를 잘하진 못했다. 예전에 내가 여행다니면 내가 영어로 말할 때 실수할까봐 머리 속에서 계속 의식했는데, 홍콩에서는 상대방과 내가 함께 의식하고 있었다. 흐흐... 만일 우리가 영어 공용화를 하면 딱 이정도? 혹은 조금 모자라지 않을까 싶다.

식당 등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관광지에서 뭘 물어볼 때 영어를 쓰면, 대부분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주위에 영어 하는 사람을 데려오거나,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대답하고, 혹은 바디렝귀지를 십분 발휘한다. 이럴 때면 '과연 영어가 공용어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러나 비즈니스 중심가인 Central이나 젊은이들이 많은 곳에서는 영어로 전화통화를 하거나 네이티브 영어 사용자로 보이는 서양인과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하는 젊은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역시 세대차이인가? 길에서 어딜 찾을 땐, 정장 입은 젊은이에게 물어보면 100%다. 또 대부분 친절하다.


3.

홍콩 역사 박물관을 둘러보고 느낀점과 더불어, '식민(colonial)'이라는 개념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었다. 그건 호주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 일본에게서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식민지배의 역사를 지닌 우리에게 '식민'은 가장 수치스러운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식민'지배가 피식민지역의 복리 후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완전히 원주민의 입장에서 봐도 그렇다. 미국과 호주의 원주민인 인디언ㆍ앱오리진과 홍콩ㆍ뉴질랜드 원주민인 광둥성인ㆍ마오이족이 그 예로 들 수 있다.

미국 인디언이 침략자에게 당했던 굴욕과 비슷한 역사를 호주 앱오리진들은 갖고 있다. 일반 시민들과 격리되어 꽤 많은 연금을 받지만, 호주 사회에 뿌리내리고 정착하고 살지 못하고 있다. 술과 마약으로 연금과 인생을 탕진하는 그들은 그저 원주민이기 때문에 존중해줄 뿐, 호주 백인사회, 이민자 사회와 완전 괴리돼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뉴질랜드 마오이족은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으며, 뉴질랜드 사회에 100%동화되어 백인과 주로 중국계인 이민인들과 융화돼 살고 있다. 마오이어가 공용어로서 존중받고 있으며, 인구 비율보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있을 정도니까... 뉴질랜드의 경우, 내가 쉽게 진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식민 지배가 지역인들에게 꽤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경우가 아닌가 한다. win-win의 관계라고 할까? 물론 갈등은 겪었겠지만, 상대적으로 잘 극복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홍콩도 조금 비슷하다. 개화기까지 아무 이름없는 작은 섬에 불과한 홍콩은 영국이 할양받고 독점적인 대중국 교역항으로 발전한다. 그 어느 곳보다 빨리 교통과 전신이 들어오고, 대륙이 혼란스러울 때 비교적 안정된 정치환경으로서 성장한다. 그러나 제 2차대전 일본의 침략으로 쑥대밭이 되지만, 전후 복구하면서 알다시피 우리, 대만, 싱가폴과 함께 급격한 성장을 이룬다.

(사실 홍콩과 싱가폴은 우리와 대만과 비교하기에 부족한 면이 있다. 이들은 환상적인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도시국가다. 이들 국민소득이 3만불이 넘는다지만, 우리나라 서울과 대만 타이페이만 보면 이들보다 전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생적 산업을 구축한 우리나라와 대만은 서로 비교할 만 하겠지...)

이를 뒷받침한 것은 훌륭한 인프라, 영어가 공용어로서 쓰이는 커뮤니케이션 이점, 지리적인 이점, 비교적 아시아에서 성숙한 민주주의와 정치환경, 중국인(동아시아인)특유의 근면함이다. 그리고 이 모든 배경엔 영국의 영향이 있었다.

1997년 중국으로 할양되기 전에 수많은 홍콩인들이 케나다와 호주, 미국 등으로 이민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피식 웃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진데... 중국넘들 민족의식도 동료애도 없는 이기주의자들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박물관과 Lonely planet을 살펴보니 또 그리 단순한 문제도 아니었다. 영국보다 100배는 신뢰할 수 없었던 중국 공산당 정부거니와, 1980년대 천안문 광장에서의 학살이 홍콩인에게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자치를 보장해준다고 하지만 과연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영연방 국적을 갖고 있으면 큰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 여권과 시민권을 갖고 영국에 가면 다른 나라보다 더 상위의, 영국 시민에 준하는 인정을 받는다. 홍콩도 마찬가지 영연방의 일원이었으므로 영국과 비슷한 수준의 대우를 국제적으로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불안을 피해 같은 영연방인 케나다나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 이민하기 쉬웠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익숙한 영어도 마찬가지...

그런 이점을 버리고 믿을 수 없는 중국 정부로 귀속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으리라고 본다. 지금은 한 국가 내에 두 체제를 갖고 있는 시스템이지만. 국방과 외교만 중국 정부가 2047년까지 갖는다고 한다.

홍콩이 지금과 같은 금융과 물류의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어의 힘이 아주 크다고 할 수 있다. 금융과 물류의 중심이 되기 위해선 끊임없이 자신을 세계에 열어놔야 한다. 자본도 인프라도 커뮤니케이션도 열어야 하는데, 그 개방의 도구로서 국제어인 영어는 큰 무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식민지배는 기본적으로 침략의 산물인 바, 그 어떠한 경우에서도 인정할 수 없다.

그건 굴욕적인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거니와 아까 말한 홍콩의 경우도 마찬가지.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떠한 목적으로든 다른 민족을, 국가를 무력으로 침범해 주권을 빼앗는 일은 절대 선화(善花)시킬 수 없다.

그러나 이래 저래, 내가 파악한 바, 홍콩은 영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지금도 그 수혜를 누리고 있다. 비록 국제항으로서 존재는 상하이에게 위협받고 있지만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홍콩은 모국인 중국의 도움도 받고 있으니, 꽤 복받은 땅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미디어몹 : 2006/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