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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藝術의 뜰

茶山의 賢과 明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1. 示二子家誡 - 두 아들에게 내려주는 교훈

저녁 무렵에 숲 속을 거닐다가 우연히 어떤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숨이 넘어가듯 울어대며 참새처럼 수없이 팔짝팔짝 뛰고 있어서 마치 여러 개의 송곳으로 뼛속을 찌르는 듯 방망이로 심장을 마구 두들기는 긋 비참하고 절박했다. 어린애는 잠깐 사이에 목숨이 끊어질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나무 아래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아아! 세상에 이 아이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 벼슬을 잃고 권세를 잃은 사람들, 재화를 손해본 사람들과 자손을 잃고 거의 죽게 된 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달관한 경지에서 본다면, 다 밤 한 톨에 울고 웃는 것과 같을 것이다.



2. 又示二子家誡 - 두 아들에게 또 다시 내려주는 교훈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자를 마음에 지녀, 잘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부지런함[勤]이란 무얼 뜻하겠는가? 오늘 한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때 할 일을 저녁때로 미루지 말며,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 오는 날까지 끌지 말도록 하고, 비 오는 날 해야 할 일도 맑은 날까지 끌지 말아야 한다.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하고, 어린 사람들은 직접 행동으로 어른의 감독을 실천에 옮기고, 젊은이는 힘든 일을 하고, 병이 든 사람은 집을 지키고, 부인들은 길쌈을 하느라 한방중[사경]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 요컨대 집 안의 상하 남녀 간에 단 한 사람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또 잠깐이라도 한가롭게 보여서는 안 된다. 이런 걸 부지런함이라 한다.

검[儉]이란 무얼까? 의복이란, 몸을 가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고운 비단으로 된 옷이야 조금이라도 해지면 세상에서 볼품없는 것이 되어 버리지만 텁텁하고 값싼 옷감으로 된 옷은 약간 해진다 해도 볼품이 없어지지 않는다. 한 벌의 옷을 만들 때 앞으로 계속 오래 입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해서 만들어야 하며, 곱고 아름답게만 만들어 빨리 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으로 옷을 만들게 되면, 당연히 곱고 아름다운 옷을 만들지 않게 되고, 투박하고 질긴 것을 고르지 않을 사람이 없게 된다.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 가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 안으로 들어가면 더러운 물건이 되어 버린다. 삼키기 전에 벌써 사람들은 싫어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는 것은 정성 때문이니 전혀 속임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늘을 속이면 제일 나쁜 일이고, 임금이나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부가 같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동업자를 속이면 모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속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기의 입과 입술이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여 입과 입술을 속여서 잠깐동안만 지내고 보면 배고픔은 가셔서 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이러해야만 가난을 이기는 방법이 된다.

금년 여름에 내가 다산에서 지내며 상추로 밥을 싸서 덩이를 삼키고 있을 때 구경하던 옆 사람이 "상추로 싸 먹는 것과 김치 담가 먹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답해 "그건 사람이 자기 입을 속여 먹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하여, 적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맛있고 기름진 음식만을 먹으려고 애써서는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 보는 일에 정력을 소비할 뿐이다. 그러한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 처지를 극복하는 방편만이 아니라, 귀하고 부유하고 복이 많은 사람이나 선비들이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유지해 가는 방법도 된
. 근과 검, 이 두 글자 아니고는 손을 댈 곳 없는 것이니 너희들은 반드시 명심하도록 하라.



3. 上仲氏 - 둘째 형님께 글월 올립니다.

어느 하루 저녁에 집주인 노파가 곁에서 한담을 나누다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인데 이런 뜻을 아시는지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이 교훈을 세우기를 아버지를 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하도록 했고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게 하였으며 복(服)을 입을 경우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는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해 버리도록 하였으니 이거 너무도 편파적이 아닌가요?"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나를 낳으셨다라고 했기 때문에 옛날 책에는 아버지가 자기를 처음 태어나게 하신 분으로 하였소. 그 어머니의 은혜도 무척 깊기는 하지만 하늘의 으뜸인 탄생되게 하는 근본의 은혜가 더 중요한 탓일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선생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풀이나 나무를 예로 들어서 말하겠소. 아버지는 나무나 풀의 종자입니다. 어머니는 나무나 풀로 보면 토양입니다. 종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그 베푸는 것이 지극히 미미한 것이지만, 부드러운 흙의 자양분으로 길러내는 흙의 은공은 대단히 큽니다. 그러나 밤의 종자가 밤나무로 되고 벼의 종자가 벼로 되는데 있어 그 몸 전체를 이루는 것은 모두가 땅의 기운이지만 결국은 나무나 풀의 종류는 본래 씨를 따라서 나뉘게 되는 것이니 옛날 성인들이 교훈을 세워 예를 제정한 것이 그러한 이유인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이러한 말을 듣고 흠칫 크게 깨달아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천지간에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오묘한 진리가 이러한 밥 파는 노파로부터 나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기특하고 기특한 일이기도 합니다.


-> 이 글은, 여성주의 관점으로 볼 때 그리 달갑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대의 잣대로 중세의 사고를 재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난 한 때 세상을 주물럭거렸던 다산이 밥 파는 노파와 대화하면서도 옳다고 여기면 크게 깨달아 공경하는 마음이 드는 열린 자세를 닮고 싶을 따름이다.

(미디어몹 : 2006/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