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선생의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을 읽은 때가 대학 졸업 후 첫 직장 생활하던 무렵이었으니 이제 18년이 지났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같은 글에 열광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 산문집 '허송세월'의 첫 서문의 제목이 [늙기의 즐거움]이라니... 이제 70이 훌쩍 넘은 노작가의 쓸쓸함이 묻어나 조금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죽는다는 것의 의미, 고요함에 대한 이야기가 산문집 전반에 깔려 있으면서도 어린이, 생기 넘치는 학생들, 젊어서 미지의 세계로 나간 청년들과 세상의 올바름을 향해 성큼성큼 발디딘 안중근 등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겹쳐 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폭싹 속았수다'의 사계절 정서와 비슷하다는 인상도 받을 수 있었다.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되어 있고 사물화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데, 죽은 뒤의 시간의 낯섦은 경험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이 낯선 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평안이나 불안 같은 심정적 세계를 일체 떠난 적말이라면 더욱 좋을 터이다. - page 7"
나는 이 산문집의 쓸쓸한 서문보다 아래의 문장에서 훨씬 더 큰 감동을 느꼈다. 죽음의 쓸쓸함을 얘기하는 노작가가 망망대해를 나아가는 20대의 찰스 다윈에 대해 얘기할 때, 문장의 생기가 무엇인지 느껴질 정도였다.
"비글호가 출항하던 새벽의 플리머스 항은 나를 설레게 한다. 이날 새벽을 기점으로, 인류의 사유는 사물 쪽으로 질서 있게 전환하기 시작하는데, 나는 이 새벽이 구약성서의 <창세기> 이후로 가장 새로운 새벽이라고 생각한다. 스물여섯 살의 청년 장교 피츠로이가 이 배를 지휘했고 스물두 살의 청년 다윈이 박물학자의 신분으로 이 배를 타고 있었다. 다윈은 아무것도 미리 주입하지 않은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바다로 나아갔다. 다윈은 인간의 관찰과 판단으로 세계의 총체적 모습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그는 사물에 선행하는 가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출항할 때 다윈은 영국의 대문호 존 밀턴의 <실낙원>과 그가 신뢰하는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를 지니고 배에 올랐다. <실락원>의 서사구조는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바탕하고 있다. 이 대서사시는 하느님이 창조한 낙원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쪽에서 인간세의 기원을 이루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지질학원리>는 이 지구의 현 상태는 오랜 시간에 걸친 물리적/화학적 변화의 결과물이라는 학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 두 권은 화해하기 어렵고, 연결시키기 어려운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스물두 살의 다윈이 왜 이 책 두 권을 기나긴 항해의 동반자로 선택했는지를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려면, 또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쪽으로 가려면 양쪽을 모두 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다윈의 마음이었을까. 태평양의 파도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이 책 두 권을 읽는 다윈이 마음 속에서 진화와 창조는 대립하는 모순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설명되어야 하는 엄중한 과제였을 것이다. - page 224 ~ 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