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文學과 藝術의 뜰

많이 웃는 사람은 행복하고, 많이 우는 사람은 불행하다 - "쇼펜하우어 소품집"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불교 철학과 참 많이 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승리, 성취, 성공등을 쫒으려고 하기 보다 고통을 없애는 편이 행복에 더 가깝다는 사상이 특히 그런 것 같다. 30대 중반 회사 생활의 희비에 휩싸여 힘들어 할 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으며 위안을 많이 삼곤했었다. 최근에는 좀 더 불교 철학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서 이진경 교수의 '불교를 철학하다' 강좌도 간간히 시청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의 한 웅큼을 쇼펜하우어 관련 서적으로 채워져 있어 호기심에 읽어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하석진씨가 '나혼자 산다'에서 소개해 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책이 가장 인기가 많은 것 같았는데 기왕 읽을 거 쇼펜하우어가 직접 저술한 책을 읽고 싶어 이 책을 골랐다.

 나는 삶의 지혜가 전적으로 인간의 의식에 내재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행복론으로 불리며, 행복론이란 인생을 될 수 있으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술을 가리킨다. 이런 기술은 행복한 존재로 거듭나는 지침이 될 수 있다. 다만 이 사실을 순수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여기서는 주관적 판단이 중요하므로) 오히려 냉정하고 노련한 성찰을 통해 비존재(존재의 부정형)가 되느니 행복한 인생을 사는 편이 훨씬 더 낫다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의 지혜라는 개념에서 보면 행복한 삶에 끝없이 집착하는 이유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행복한 생활 자체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이 같은 존재의 개념과 부합하는지, 아니면 부합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나는 내 철학이 이미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아니라고 답한다. 하지만 행복론은 똑같은 질문에 긍정을 표한다. 나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권에서는 이 행복론 자체의 태생적 오류를 지적한다. 그래서 행복론을 완성하기 위해 원래 나의 철학이 추구하는 높은 경지의 형이상학적이고 윤리적인 견해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 결과 이 책은 이러한 오류를 고수하면서 익숙하고 경험에 근거한 순응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에 행복론이라는 단어 자체는 완곡한 표현에 불과하니 제한적인 가치만을 지닌다. 또한 행복론을 완벽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 주제는 끝없이 논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남들이 한 말을 되풀이할 확률도 높다 - page 8~9, 서문 

 쇼펜하우어는 동시대 철학자 '헤겔'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고 한다. 위의 글을 옮기고나서 보니 헤겔의 사상도 비판했지만 '헤겔'의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함 역시 비판적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의 주요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최소한 이 책 '소품집' 은 헤겔의 철학 이론처럼 어렵지는 않아 읽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미래에 다가올 재앙을 인간이 불안해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 시기가 명확하다면 이 역시 재앙이다. 하지만 이런 재앙은 극소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재앙은 그냥 닥쳐오거나 어쨌든 닥치기 마련이지만, 그 일이 일어날 시기는 전적으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런 두 가지 재앙을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한시도 평안할 날이 없다. 따라서 불확실한 재앙이나 올 시기가 정확하지 않은 재앙 때문에 인생의 평화를 잃고 싶지 않다면 그런 재앙이 그리 빨리 오지 않을 것처럼 바라보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오히려 소망, 욕망, 요구 사하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괴테의 노래 구절인 '나는 나의 일을 어느 곳에도 맡겨두지 않았네.'의 원래 의미는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벌거벗은 상태의 존재로 돌아간 뒤에야 행복의 토대가 되는 정신의 평화에 닿을 수 있다는 의미다. 현재를 살아가고 인생 전체를 즐길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데 이런 평화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은 한 번 뿐이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내일이 다시 온다고 착각한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며, 그날 역시 단 한번만 올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루하루가 인생에서 필수 불가결한 부분으로 대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고, 오히려 개인이 포괄적인 개념에 포함되듯 하루하루도 인생에 포함된 것으로 여긴다. 이와 마찬가지로 즐겁고 몸이 건강한 시기에도 현재를 더 존중하고 즐길 줄 안다면 아프고 슬플 때 고통과 결핍이 없던 시절을 잃어버린 낙원처럼 한없이 그리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친구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과 같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좋은 날을 알아채지 못하고 보내 버린다. 그러다 나쁜 일이 생기면 좋았던 날이 다시 오길 소망한다.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즐기지 않고 뾰로통한 얼굴로 지나치고는 나중에 침울한 시간이 찾아오면 헛된 그리움으로 한숨을 쉰다. 그 대신 지금 무심하게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현재가 견딜 만하다면 평범한 일상이라도 존중해야 한다. 비록 평범한 일상이라도 신비한 과거 속으로 넘어간 후에는 불멸의 빛을 덧입은 기억으로 보존된다. 그러다 언젠가 곤란한 상황이 닥쳤을 때 장막이 걷히고 과거의 기억은 인간의 내면이 갈구하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 page 200 ~ 202

 200여년 전 철학 사상가의 책이 현대 우리사회에서 뒤늦게 각광받는 이유를 나름 생각해 보면, 과거와 같은 고성장이 힘들어진 환경에서 각자 개인이 어떻게 세상과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더욱 진지한 고민이 이루어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출산/고령화, 세계 경제의 패스트 팔로워로서의 방정식이 중국으로 옮겨간 현실 속에서 개인의 노력이 그와 비례하는 성과와 성공으로 연결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경쟁 속에서 매몰되어 10대를 보내고, 20대 이후에도 이 레이스를 지속하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노년이 되어서야 각광을 받았던 염세주의 철학자에게 스며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왜 40대에 쇼펜하우어를 읽으면 좋은지 곰곰히 생각해 봤다. 욕망이 안 채워지면 결핍으로 고통스럽고, 욕망이 채워지면 권태로 고통스러워서(또 다른 욕망을 찾에 헤메는) 인생은 결핍과 권태를 왔다 갔다 하는 '고통'이라는 것을 머리가 아닌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시기라서가 아닐까 싶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c-GTxLhWCI&ab_channel=5%EB%B6%84%EB%9A%9D%EB%94%B1%EC%B2%A0%ED%9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