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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藝術의 뜰

한국 전쟁에서 속에서 살아가고 사랑하던 이야기 - 박경리 '파시'

 

 대학에 입학할 무렵, 막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막내 이모는 나에게 졸업하기 전에 꼭 박경리의 토지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지금 '토지'라는 기나긴 여정을 떠나기 전 워밍업으로 박경리 선생님의 단권 소설을 둘러보는 중이다. '김약국의 딸들'을 생각하며 도서관을 거닐던 중 '파시'가 눈에 들어와 가져다 읽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부산에서 통영으로 오는 배에서 조만섭과 수옥이 내리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전쟁으로 가세가 기울어져 힘겹게 삶을 해쳐나가는 학수, 학자가 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사랑을 지켜낼 용기와 기개가 없는 의대생 응주와 여대생 명화가 등장한다. 밀수업자 서영래는 전쟁의 혼란 속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인물이며, 조만섭의 후처 부인인 서울댁 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옥을 팔아넘기는데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파시'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러한 인간 군상들이 어떻게 뒤엉켜 살아가는지 펼쳐놓고 있다.

 작중 무대는 1950~1953년의 통영과 부산이다. 통영과 부산은 전쟁의 한 가운데는 아니었기 때문에 피난민과 물자가 몰려들었다. 박경리 선생의 고향이 통영이라고 하던데, 나 또한 3년간 거제와 부산에서 지낸 기억이 있어 박경리 선생님이 묘사하는 바다와 부두의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통영에서 부산으로 오가는 배, 학수와 수옥이 통영에서 도망쳐 머무는 섬, 응주와 명화, 죽희가 만나고 헤어지는 부산의 거리가 내 머리 속에 1950년대의 아련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가장 고구마같던 응주와 명화의 관계는 박의사의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고백으로 산산조각이 난다. 소설은 새로운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명화의 뒤를 쫒는 응주를 클로즈업 하며 마무리한다. 명화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오래 전 쓰인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세련된 작품의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