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태동기라고 불리는 지금, 사람들은 우리가 기술 발전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문명사적 변혁의 시기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 앞에 어떤 미래가 펼쳐 있을 지 어떤 사람들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또 어떤 이들은 한켠에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거 이와 비슷한 문명사적인 변화의 시기에 어떻게 사람들의 삶이 달라졌는지를 한번 거슬러 들여다본다면 잘 하면 뭔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지혜의 눈을 뜰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두려운 마음은 조금 덜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삼프로TV 언더스탠딩 채널 김태유 교수님의 위대한 문명사(링크)를 보는 것과 일견 비슷한 맥락으로, 20세기 경제사를 읽어 보았다. 700페이지가 넘는 대단히 두꺼운 책이지만 이 책의 주요 맥락은 서문에 담겨 있다.
'오늘날 하루에 대략 2달러나 그 이하로 살아가는 소위 최극빈층은 세계 인구의 9%가 채 안되지만 1870년에는 무려 약 70%였다. 심지어 오늘날 그 9%의 최극빈층 마저도 대다수가 공공의료, 그리고 막대한 가치와 힘을 지닌 이동통신 기술의 혜택을 누린다. 좀 더 운이 좋았던 일부 국가에서는 1인당 소득이 1870년에 비해 20배, 1770년에 비해 최소한 25배 이상 증가했다. 그리고 번영이 앞으로 몇 세기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오늘날 이렇게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들의 보통 시민들은 옛날이라면 마법사와 신의 특권으로만 여겨졌을 여러 권능 - 이동하고, 소통하고, 만들고, 파괴하는 - 을 부릴 수가 있다. 운이 없는 나라나 남방세계에 사는 다수의 사람들이라고 이제는 1800년이나 1870년에 살던 조상들처럼 겨우 2~3달러의 돈으로 하루를 연명하지 않는다. 그들의 하루 소득은 적어도 15달러에 근접한다. - page 30~31'
마치 TV드라마처럼 1870년 이전으로 우리가 돌아간다면, 지금 우리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은 오히려 그 당시 최고 부유층의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풍요롭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류는 조직과 연구를 위한 제도 그리고 기술 - 본격적인 세계화, 기업 연구소, 근대적 대기업 - 을 갖추었다. 이 세 가지가 열쇠였다. 이들의 힘으로 그전까지 인류를 지독한 가난에 가두었던 문을 열어젖힐 수 있었다. 어떻게 인류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마침내 그 해답을 가지고 있던 시장경제에 제기되었다. 열어젖힌 문으로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길에는 온갖 좋은 일들이 따라올 것이 틀림없었다. 실제로 많은 좋은 일들이 따라왔다.... (중략) 좋은 일들도 있었지만, 나쁜 일들도 많았다 인류가 가진 기술 - 자연을 조작하는 경성 hard 기술과 인간을 조직하는 연성 soft 기술 양쪽 모두 - 은 착취, 지배, 독재와 폭정의 도구로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장기 20세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잔혹하고 피에 굶주린 독재 정권들이 출현했다. - page 19~21'
많은 사람들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인류 문명의 발전 동력을 과학 기술의 발전에서 찾는다. 그러나 혁신적인 기술의 발전은 그 발전 자체보다 기술을 어떻게 사회가 조직하고 분배하며 지속될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는 제도하에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1870년대 이후부터 기술이 돈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업 연구소와 근대적 대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그 기술이 국지적인 지역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세계화를 통해 기술과 부가 세계로 나아가고 이렇게 뻗어나간 기술과 부가 세계화를 가속시키는 순환의 구조가 만들어져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시대까지 이르게 되었다. 비록, 도널드 트럼프의 시대를 맞아 세계화는 멈추어섰지만.
영어 원제는 Slouching towards Utopia이다. 장기 20세기(1870년 ~ 2010년, Long Twentieth Century)는 이러한 기술적, 경제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토피아로 입성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비틀거리며(slouching) 향해 갔을 뿐인가를 하이에크와 폴라니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이에크가 말한 시장의 역동성이 부를 창출했다면 그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려 했던 폴라니의 외침이 충돌하며 20세기의 굴곡진 드라마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최근 내용은 익히 잘 알고 있기도 해서 187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경제사를 더 관심있게 읽어 보았다. 대략 그 당시 세상이 돌아갔던 흐름은 알게 되었으니 그 때를 살아간 개인들 - 시대의 흐름을 올라탄 사람과 몰락한 사람, 우왕좌왕한 사람들 - 이야기를 좀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AI시대의 변화가 막막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150여년 전 인류가 비슷한 기로에서 어떻게 나아갔는지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