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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으로 간 아프간 특별기여자의 1년, 그곳에 미래가 있었다

 

 내 인생 첫번째 해외여행지는 중국 연변이었다. 대학시절 교내 학생들과 단체로 북한과 중국 접경 지역 고구려 문화교육기행을 떠나 북경을 거쳐 귀국하는 일주일간의 여행이었다.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에서는 중국어와 한글이 공식언어로 쓰이게 되는 걸 알게 되었다. 쉽게 말해 거리의 간판이나 공식 문서등 한글/한국어는 적어도 조선족 자치구내에서는 중국어와 비슷한 공식적인 지위를 갖는다. 아마 다른 소수민족 자치구도 각 민족별로 비슷한 정책을 펴는 것 같은데 공산주의 국가로서 떠올릴 수 있는 경직성과 다른 개방된 정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호주에서 약 4개월 정도 짧은 어학연수 겸 머무른 적이 있다. 당연히 백인이 주류였지만, 다양한 아시아계 사람들도 함께 모여 살고 있었다. 아시아계라고 하더라도, 한국/중국/일본 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도네시아등 동남아나 남태평양 지역의 사람들, 인도등 서아시아계나 중동 및 중앙아시아 쪽 사람들과 비교적 두루 접하고 교류도 하게 되었다. 18년전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마주치게 된 여러 인종이 뒤섞인 도시의 풍경을 보고, '아 선진국이 되면 세계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공부하고 일하고 머무르는 나라가 되는 건가 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5년 전후 약 2년간 회사 업무차 말레이시아에 자주 출장을 떠났다. 쿠알라룸프르 역시 정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Melting Pot이었다. 아름다운 야자수와 멋진 건물, 생각보다 잘 꾸며진 도시 생태계와 영어에 비교적 능숙한 사람들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던 것 역시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U$10,000대인 나라도 개방적인 문화와 적절한 수준의 일자리가 있으면 선진국 대도시 못지않게 이민을 꿈꾸는 땅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점이 적잖이 놀라웠던 기억이 난다.  이런 경험 때문일까, 나는 도시와 거리에 한국 사람들만 바글바글한 것 보다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함께 어울려 있는 모습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다 잠시 잡지 코너에 들렸는데, 시사인에서 취재한 아프간 특별기여자와 관련된 아래 기사를 조금 시간을 들여 꼼꼼히 읽어 보았다. https://n.news.naver.com/article/308/0000032323?lfrom=kakao 

 

울산으로 간 아프간 특별기여자의 1년, 그곳에 미래가 있었다

차창 밖으로 아파트 단지가 쉴 새 없이 휙휙 지나가더니 어느 순간 풍경이 달라진다. 공장 굴뚝이며 조선소 크레인들이 울산대교 너머로 솟아 있다. 바닷가 선적 부두에는 자동차 수천 대가 가

n.news.naver.com

 내용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전복으로 인해 한국으로 떠나올 수 밖에 없었던 아프간 특별기여자와 가족 158명의 이야기이긴 하나, 더 깊게 들어가면 대한민국의 이방인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물음을 준다. 더욱이 이 가족들이 생활의 터전을 잡은 곳이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인데, 첫 직장이 조선소였고 처가가 울산인 내 개인적인 경험이 더해져 먹먹한 느낌을 마주하며 기사를 읽었다.

 아직 주위를 둘러보면 외국인의 한국 정착에 배타적인 사람들이 많고, 특히 북미나 유럽에서 온 사람들보다 개발도상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급속도로 늙어가고 출산율이 떨어지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활력을 읽고 서서히 말라들어갈 것이다. 국내 제조업 생태계는 붕괴되고, 인건비 상승과 함께 물가는 치솟으며 물가와 함께 올라가는 금리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사람한테 이 정성으로 잘해줬어봐라.” 지인들은 그에게 핀잔을 줬다. 어떤 특별 기여를 했길래 30평짜리 아파트를 주느냐고도 했다. 김창유씨가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시대가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100명 규모 업체에 외국인들 10명 들어오면 일자리 10개 뺏겼다고 그랬잖아요. 지금은 그 10명이 들어오면서 90명의 일자리를 지키는 거예요.” 외국인 노동자는 공업도시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무조건 견디라거나, 노동력만 제공하고 본국으로 떠나라는 식의 태도는 ‘일손’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현실이 그렇다면 김씨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 기사 본문

 외국인,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온 외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어일 것이다. 사실 말만 통하면 어떻게든 문화와 마음의 벽은 드나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대학에서 언어학을 공부해 보았으니, 커리어의 1기가 마무리되고 운 좋게 돈 때문에 아둥바둥 살지 않아도 되는 행운이 찾아온다면 외국인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일하러 온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해왔었다.

 이미 이 기사에서처럼 한국어와 한국 교실에서 아프간 특별기여자 학생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헌신을 다하고 있고 이를 위한 행정적인 지원과 경험이 뜻하든 뜻하지 않든 이번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의 정착 지원으로 쌓여가고 있다고 한다. 뭔가 다음 Step으로 한 단계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열린 사회로 나아가야 된다는 도덕적 당위성과 함께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도 이제 더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모두에게 더 필요한 시대로 한 걸음씩 발을 디뎌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성을 들여 아프간 특별기여자분들과 관련된 이 기사를 작성한 김영화 기자, 신선영 기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