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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과 藝術의 뜰

강박과 병적인 웃음의 슬픔 - '조커'

 

이 영화를 잘 정리해 주신 블로거님의 글 일부를 퍼왔다.

http://blog.naver.com/evildoll/221676205783

 

조커(Joker) : 공감의 상실, 강박적 웃음, 그리고 폭력이 가리키는 것

조커 감독 토드 필립스 출연 호아킨 피닉스 개봉 2019.10.02. 미국 리뷰보기 스포주의 어느 한 신문 컬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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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 분장한 어느 괴한의 살인 사건과 시민들이 일으킨 대규모 폭동 사이의 직접적 인과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한 두 건의 모방 범죄라면 모를까, 마치 약속된 신호탄처럼 대대적인 시위를 기폭하려면 다른 조건들이 추가적으로 조응하지 않고선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영화 초반부, 고담시 청소부 파업에 관한 보도에 주목해 보자. 이어지는 뉴스에선 넘쳐나는 쓰레기 때문에 쥐 떼로 몸살을 앓게 됐다는 것, 이런 식이면 곧 전염병이 창궐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읊어냈으나 바로 다음을 잇는 머레이 쇼는 마치 이 뉴스를 낚아채듯 유머로 뒤바꿔 버린다. 어마어마한 쥐들은 어마어마한 고양이로 단박에 해결된데요...하하... 진행자 머레이의 이 멘트는 어느 권력자의 발언을 풍자하는 어투였지만 쇼의 의도에 맞춰 시청자들이 이 사안을 박장 대소로 웃어넘길 때 이 유머에 숨겨진 분노의 포인트는 망각된다.

  쓰레기가 빈민가를 넘어 이젠 부촌으로 차고 넘쳐날 만큼 고담시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될 때까지 벌어진 사태에 대한 이런 식의 무마는 아마도 수십 수백 차례 켜켜이 누적돼왔을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공론화로 이끌 기회들이 고갈되었을 때 사력을 다한 호소가 무시됐을 때 결국 소통의 벽에 부닥친 사람들의 절망감이 곧 살의 등등한 분노로 전환하는 수순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머레이쇼의 방청객들이 매번 보여주는 기계적 웃음은 영화 종반부, 아서 플렉이 이 쇼에 초대 됐을 때 던져진 야유와 대비를 이룬다. 어느날 아들이 만취 운전으로 숨졌다는 소식을 어머니가 듣게 됐다는(?!)... 그런 얘기를 들려 줬을 때 머레이와 관객은 그것이 결코 이 사회에서 유머로 수용될 수 없다고 정색한다. 시민들 공분을 살 만한 정치인의 발언이 아주 쿨하게 코미디로 뒤집힐 수 있다면, 아서의 것은 왜 안될까? 따져보면 애초부터 원칙 같은 것은 없는 거였다. 심리 상담사에게 아서가 나지막히 내뱉었듯 말이다. 어차피 조크는 주관적인 거니까요. 아서 역시 기준에 맞추려는 거듭된 시도에 지쳐버린 듯, 나중엔 결국 누구한테서도 공감과 웃음을 바라지 않는다.